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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훈 칼럼 ‘바나바’같은 중재자는 없나요?

편집국장 0 1788

박재훈 칼럼 ‘바나바’같은 중재자는 없나요?


연일 나랏님들의 다투는 소리에 짜증이 날 정도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것도 법을 다루는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괴한 다툼이다.


진보와 보수 간의 다툼이야 당연한 정치적 진영 다툼이라지만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다툼은 ‘집안 싸움’으로만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둘의 임명자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임명을 받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두 사람이 충돌하는 모습이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치고 힘든 국민에게는 충분히 짜증거리가 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건지?

다툼이야 사람 사는 세상에 다반사다.


문제는 이들의 다툼에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툼이 일어나면 말리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지금 높은 사람들의 다툼에 말리는 사람이 없다.

이럴 때 누군가가 중재(仲裁)를 하고 타협안을 내고 양보를 할 수 있도록 설득도 하고... 뭐 이런 화해의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중재할 사람이 주변에 그렇게도 없는 것일까?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마주보고 달리기만 하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같이 보이기만 하니 불안하기도 하고 짜증만 배가 된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A.D.30년 전후)의 기록이 성경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이때 교회를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또는 ‘예루살렘’교회라고 부른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예루살렘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어서 부활하시고 그리고 하늘로 오르신 승천 사건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순수 유대교)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메시아로 믿기 시작한 사람들(순수 기독교)과의 충돌이 심각하게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 구원자임을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은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주류 계층을 이루고 있었고,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에게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같이 보였다.

이렇게 유대교와 기독교가 심각한 갈등을 이루고 있을 때 유대교인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 ‘사울’이라는 인물이다.


‘사울’은 극보수적인 유대교인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기독교인들을 없애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거나 심지어 죽이는 일에 선동자 또는 주동자로 활동을 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 구원자로 인정하고 믿겠다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교회 안의 교인들은 ‘사울’이란 존재를 두려워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자신들을 해코지 하기 위한 ‘위장 교인’일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이때 양 극단적인 관계 속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나바’라는 사람이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그는 교회로 들어 온 ‘사울’과 사울의 진심을 외면한 채 사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기존 교인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중재의 역할을 한다.

“사울은 더 이상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도 우리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고백한 신앙인입니다. 더 이상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우리와 동일한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날 이후 교인들은 사울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봉사하며 살기로 했다.

교회의 들어간 사울은 자신의 성격만큼이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한다.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복음을 전했다.

훗날 ‘사울’은 이름을 바꿔 ‘바울’이 된다.

기독교 역사는 ‘바울’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큰 흔적을 남겼다.

‘바울’을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게 길을 열어 준 인물이 중재자 ‘바나바’이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극한 감정을 가지고 오해를 하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의 주류계층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다툼!

사법부 판단을 받아 보겠노라고 양쪽이 판사들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런 방법은 승자와 패자만 만들 뿐이다.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다면 같은 편임은 분명하다.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라면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두 사람도 국민을 위해 양보하고 타협하고 서로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바나바’같은 중재자는 없는 것일까?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중간에서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 보고 첫 단추가 왜 잘못 채워졌는지를 점검해 보면서 화해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없는 것인가?

다툼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다툼은 옳고 그름, 더 좋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다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흙탕 싸움, 아귀다툼이 되고 만다.

이런 다툼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직자들이 밤낮 다툼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국민들은 짜증이 나고 그런 공직자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공직자는 개인을 넘어 국가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봉사는 국민의 일꾼이다.

국민의 일군은 개인이나 조직, 당파의 이익을 넘어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바나바’같은 중재자는 없는 것일까?

다툼을 위한 뜨거운 논쟁이나 악착같이 이겨보려고 다투는 사람도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중재를 하고 타협안을 내고 양보를 할 수 있도록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 박재훈 목사·포항강변교회 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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